일상 다반사 / / 2021. 7. 26. 15:33

역병으로 고추 농사가 망했다

남들은 친정에 가면 쉬다 오는 줄 알지만, 나에겐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
친정에 간다는 것=농사를 하러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편히 쉬어 본적이 1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친정나들이에도 어김없이 고추밭에 나왔다. 내려오는 차안에서 '누가 이 폭염에 고추를 따고 있겠는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이 따고 계셨고, 후다닥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1시간만 일해도 주르륵 흐르는 땀때문에 눈이 따가운것은 물론이요 어지럽기까지 했다. 이래서 고추따다가 열사병을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 더위가 내 평생 겪은 것 중에서 가장 심한 더위였는지 1시간 단위로 물보충을 하지 않으면 손이 떨렸다. 부모님 역시 '이렇게 더운건 처음이라'고 언급하실 정도로 뜨거운 한낮에도 일하시던 부모님이, 에어컨은 절대 안켜시던 부모님이 알아서 에어컨 어떻게 켜는지 묻고 4시 이후로 일하려고 하시니 말 다했다. 정말 맹더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 아직 안땄을 텐데, 일찌감치 죽어버린 고추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한가지 특징이라면, 그 고추들의 상태가 영 안좋다는 것, 사진으로만 봐도 알 수 있듯 고추가 싹 다 죽었다. 더워서 말라 죽은게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역병이 돌아 싹다 죽었다. 일평생 고추농사를 해오시면서 올해와 같은 흉작은 처음이었기에, 엄마는 2달간 스트레스로 병원까지 다니셨다. 눈뜨면 바로 밭이 보이다 보니, 죽어가는 고추를 보면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알만하다. 이제는 안정이 되었다고 말씀하지만 '남의 집 고추는 다 살았다던데.....올해는 일 조금하라고 그런갑다. 올해는 쉬어가야지...벌어놓은 돈으로 살면 되지' 하면서 미련이 남는지 계속 같은 얘기를 반복하셨다.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괜찮아~쉬어가면 되지..이번에는 놀어~"하면서 계속 맞장구 쳐 드렸다.
그런데 나역시도 30년 넘게 고추농사를 도와드리면서, 이렇게 까지 망한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상태가 안좋긴 했다.

 

회생기미없음

 

9천개 정도 심었는데 10프로? 아니 5프로도 건지지 못할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몸이 아프셔서 서울로 통원치료 다시니는 부모님을 보자니,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고추따는 부모님을 보자니, 고추 농사 망한게 다행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엄마 속도 모르고 철없는 소리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더위에 일을 하는게 정말 잘못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친 더위니 말이다.

웬만해서는 얼굴노출 안하는데, 얼음물로도 식혀지지 않는 열기로 고생하고 있는 내 얼굴이 너무 적나라해서 게재해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질때까지 계속 따는 이유는..

나보다 몇백배 더 힘들, 이모와 부모님이 그저 묵묵히 일하시기 때문이다. 홀딱 다 젖은 이모 등을 보자니 그 고생이 실로 전달되는 것 같다. .

깨끗이 닦아 놓은 고추

그러나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고추이기에, 올해는 욕심을 버리고 하우스 반만이라도 채우는것에 만족해야 할 듯 싶다. 일주일 뒤에 다시 한번 따야하는데, 그때까지 잘 말라주기를 바래본다.

'이 무서운 역병아~ 다음해에는 그 다다음해에도 아니 평생 오지 말거라!~"
지금까지 노블루의 고추농사 이야기였습니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